섹스에 대해 충분하게 말하고 있는가? 물론 우린 친구들과 페니스의 길이와 질의 넓이에 대해서 농담을 하고 요즘 TV나 영화에 나오는 야한 장면들, 연예인중 누가 누구랑 사귀고 있느냐에 대해 끝없는 가십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여자들이 섹스에 대해 가장 오픈되어야 하는 두 장소에선 - 침실과 산부인과 진찰실-여전히 깊은 침묵이 존재하니까.

미국 <셀프>지가 1천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 여성 중 절반이 의료진에게 HIV(에이즈 바이러스) 혹은 기타 STD(Sexually Trans mitted Disease, 성행위로 감염되는 질병)에 대한 얘기를 결코 화제에 올리지 않으며 4분의1은 자신의 섹스 역사(파트너수, 과거의 감염 전력 등)를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가장 터놓고 말해야 할 섹스 파트너에게도 그다지 오픈되어 있지 않다. 여성의 3분의2가까이가 현재의 파트너와 STD테스트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으며, 더 놀라운 것은 응답자 중 47%가 섹슈얼리티는 여자가 입에 올릴 화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 미국의 여성들이 이런 실정인데 한국의 실정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명심할 것은 분명, 그렇게 중요한 화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는 실로 크다는 것이다. 산부인과의사도, 남자친구도, 세상의 그 누구도 당신의 섹스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내 섹스라이프는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기 전에 침묵의 대가로 초래될지도 모를 몇몇 결과들을 직시하라. 그건 삶이냐, 죽음이냐를 구분짓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산부인과 진찰실, 여전히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여성들, 특히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 여성들이 걱정이 될 만큼 뚜렷한 자각증상이 없으면 산부인과를 찾지 않는 현실은 2008년인 지금도 여전하다. 물론 진찰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부담은 내밀한 개인사를 생판 남인의사에게 털어놓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28세의 김현정 씨(가명)는 최근 결혼을 위해 산부인과를 방문했다가 ‘미묘한’ 경험을 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어서 신체적인 상해가 계속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의사한테 아랫부분이 모두 OK인지 체크해 달라고 했어요. 난 절대 이유는 말하지 않았는데, 의사도 전혀 묻지 않았어요. 작은 칼로 찔리면서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내가 아는 상처도 있었는데, 그는 그걸 발견하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걸 정신적 충격이 컸을 자신의 섹스 히스토리가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인으로 여겼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대사를 앞두고 어렵사리 찾아간 만큼 그녀는 결혼과 섹스에 대해 더 길고 친절한 코멘트를 원했다고 고백한다. “아주 바쁘고 존경도 받는 의사여서 내 사소한 문제는 그가 시간을 할애할 만큼 중요하진 않을 거예요. 어쨌든 이상은 없다니까 난 그냥 나왔죠.” 그녀의 이야기는 산부인과에서 부딪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문제의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 들어서 많은 산부인과들이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여성의 건강을 돌보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은 존재한다. 무엇보다 환자가 문제를 솔직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 의사들 역시 최상의 치료 효과를 이끌어줄 만큼 자세하게 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의사 역시 시간에 쫓긴다면, 혹은 솔직히 환자만큼 거북해한다면 진찰 중의 심쩍은 부분을 건너뛸 수도 있다. 다른 모든 사항에 대해선 묻는데, 무언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건 당사자에게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이 있다. 그게 의사의 진짜 믿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결해야 할 것을 못했다는 점에서 환자에게 주는 영향은 동일하다.

‘아래쪽’ 질병에 대한 뿌리깊은 트라우마 “여성들은 산부인과 질환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걸렸다는 느낌을 갖죠.” 산부인과 전문의 정환욱 원장(유비 여성클리닉)의 지적이다. ‘문란한 성행위가 병을 부른다’는,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를 애매모호하고 낡은 통념에 아직까지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통념을 떨쳐버리지 못했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중 대표적인 것이 자궁경부암이다.

고 위험군인 유두종 바이러스(HPV)에 의해 감염되는 자궁경부암은 전 세계적으로 여성암중 사망률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매일 12명이 진단을 받고, 3명이 결국 사망한다. 더욱 무서운 점은 초기에는 거의 자각 증상이 없어 병원을 찾 았을 때는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궁경부암은 천천히 자라나는데다 국소적으로 팽창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피부가 터지면서 덩어리가 만들어지고, 출혈되면서 냉이 많아지고 통증을 느낄 정도로 커질 때쯤이면 이미 3기, 4기, 운이 좋아야 2기입니다.” 암의 전 단계인 상피내암까지 합쳐서 통계를 낸다면 지금도 국내 여성 암 발생률중 1~2위를 다툴거라는 게 정환욱원장의 조언이다. 이 정도면 유방암이나 위암만큼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을 것 같지만 자궁경부암이 국내에서 본격적인 관심을 모으게 된 건 최근에 이르러서다.

지난 2006년 세계 최초의 자궁경부암 예방백신인가다 실이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뒤 지난해 9월부터 국내에서도 접종이 시작된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가다 실은 최초 접종후 각각 2개월과 6개월 후 총 3차례 접종을 통해 자궁경부암 발생의 70%를 차지하는 HPV유형들(16 및 18형)뿐 아니라 암은 아니지만 외음부 등의 사마귀 형태의 종양인 콘딜로마의 90%를 차지하는 6,11형에 대한 예방 효과를 보이고 있다. ‘백신으로 예방될 수 있는 암’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이전,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자궁경부암이 묻혀 있었던 건성적 접촉에 따라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된다는 사실이 발견되기 이전 자궁경부암은 성병으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출산을 마친 나이든 여성들이나 관리를 안 하는 - 그러니까 ‘문란한’-여성들이 걸린다는 통념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확한 원인이 밝혀진 지금의 문제는 HPV가 감기 바이러스처럼 너무나 흔하다는 데 있으며 따라서 성생활을 하는 성인 여성 대부분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의 80%가 50세 이전에 한 번 이상HPV에 감염되고 성생활을 하는 20~30대 여성의 20% 이상이 일시적이나마 HPV를 갖고 있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발병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적신호다. 게다가 이를 좌우하는 주원인이 면역성이라는 것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똑같이 HPV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누구나 암에 걸리지는 않아요. 스트레스나 불균형한 식생활 등으로 암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깨져버리면 걸리게 되죠. 면역성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암이 발병하는 주기간 동안 진찰, 치료, 예방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정환욱원장의 지적이다. 현재 9~26세의 여성들이면 가다 실을 접종 받을 수 있으며, 45세까지도 예방접종이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더 나이가 든 여성들이라도 6개월~1년에 한번 경험 많은 전문의를 찾아가 자궁경부세포검사(Pep Smear)와 함께 자궁경부 확대 촬영술 또는 HPV검사를 받으면 충분히 예방과 조기 발견이 가능하다.